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수정주의적 관점 === 수정주의는 일본 제국이 선량하고 무고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수정주의라는 말이 많이 오해를 받고는 하는데, 애초에 역사학 자체가 새로 발견한 사료나 기존 자료들의 상호관계 등을 재분석해 검증하여 역사해석을 새롭게 하며 발전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역사는 본래 수정주의적인 학문이다.] 당시 미국은 일본에게 있어 천황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실제로 전후 군정에서도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차피 천황제를 보존할 것이었다면 왜 천황제를 보존해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수정주의 관점에 따르면, 원자폭탄 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 아니었으며, 미국은 소련 견제와, 전후 미국의 위상을 고려하여 전쟁이 충격적이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으로 종결되어 신화적인 서사시를 만들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하였다. 즉, 정치적 상징성, 직설적으로 말해서 위력과시 힘자랑이 목적이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이 전쟁을 그만두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순순히 항복해버리면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천황제 수호를 부르짖던 일본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일본이 항복을 거부했다며 원자폭탄을 사용할 명분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원자폭탄을 투하할 도시는 사전에 이미 지정되어서 그 도시들에는 폭격도 안 하고 일부러 남겨두고 있었다.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트리니티 실험으로 성공한 원자폭탄 실험을 공개하여 경고하는 방법을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그럴 경우에는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이 끝났다는 장엄한 정치적 상징성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통념과는 달리 원자폭탄이 일본의 항복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애초에 [[도쿄 대공습]] 피해가 훨씬 컸다.] 미국에 의하여 위력이 과장되어 홍보되었으며, 실제로는 소련의 참전과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일본의 항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수정주의 학계는 해석한다. >트루먼 결정의 옹호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한다. 즉, 항복의 조건을 얻으려 했던 일본 측의 대부분의 노력은 그때까지도 중립이었던 소련 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스탈린은 일본 측의 메시지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길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스탈린이 전후에 아시아라는 전리품 획득에 참여하려는 목적으로, 태평양 전쟁 참전이 가능해질 때까지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지연시키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일본의 교신을 감청하여 그 내용을 해독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정계에 강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 >일부 역사가들은 일본 정부가 1945년 6월 20일에 히로히토 일왕이 참석한 가운데 군사참의관 회의에서 최종 항복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항복 선언을 방해한 요인들에는 연합국들과의 의사소통 수단 부재, 연합국 측의 불확실한 요구 사항, 예상되는 일본 군부 내 강경파의 반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들은 군사참의관 회의의 마무리로 이어졌다. 일본 내에서 오고 간 통신 내용에 접근할 수 있었던 미국 정부는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7월 13일에 도청된 일본의 최고위급 외교 전문의 요약본은 이른바 <마법 요약본 Magic summary>이라 불리는데, 스팀슨과 트루먼은 그것을 읽었을 것이다. 그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아. "현재의 전쟁이 호전적인 모든 열강들의 백성들에게 더욱 큰 재난과 희생을 매일 초래하는 사실을 잊지 않고 계시는 천황 폐하께서는 전쟁이 즉시 종료되기를 충심으로 바라신다." 또 다른 예로 포츠담 회담이 열리고 있던 7월 17일에 미해군의 첩보 보고서가 트루먼과 스팀슨에게 전달되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공개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공식적으로" 패배를 인정했으며, 일본의 남아 있는 유일한 관심사는 "국민의 자존심과 패배의 융화" 그리고 "산산조각이 난 야심을 구조할 최선의 방안 모색"에 있었음을 분병히 밝혔다. 이 날은 앨라모고도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다음날이며, 트루먼이 제509혼성비행대의 출격 명령을 승인하기 일주일 전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 >전쟁을 끝내려는 일본의 절박한 외교적 노력을 스팀슨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퍼≫지에 기고한 그의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글에서 그는,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최후통첩을 일본이 불합리하게 거부함으로써 미국의 외교적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스팀슨은 이렇게 썼다. "7월 28일에 일본 총리 스즈키가 포츠담 최후통첩을 '공개할 가치가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포츠담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스팀슨은 일본의 이러한 회답 때문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어 단어인 '모쿠사츠(默殺)'를 오만한 거절로 해석한 것은 오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모쿠사츠'를 '노 코멘트(No Comment)'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아마 일본은 시간을 벌어 보려는 속셈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https://www.yna.co.kr/view/AKR20131108176700005|#]] > >스팀슨의 설명은 그의 회고록 ≪전시와 평시에 현역으로 복무하며 On Active Service in Peace and War≫에서 더욱 미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이 회고록은 공개적으로 번디와 함께 쓴 것으로, ≪하퍼≫지에 그의 글이 게재되고 1년 뒤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스팀슨은 일본이 봄과 여름에 여러 차례 평화협상을 타진한 목적을 강조한다. 즉, 일본은 '무조건 항복'의 정확한 의미를 확실하게 파악하려고 평화협상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설명으로 판단해 보면, 스팀슨은 무조건 항복 요구를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조정하길 원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6월 19일에 개최된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의 합동회의에서 국무장관 대리 조지프 C. 그루는 '무조건성'으로 부터의 후퇴를 촉구했다.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은 그의 사후에 공개된 일기에서 이 회의의 토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항복 조건' : 일본인들에게 어떤 종류의 항복 조건을 요구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특히 그들 나름의 정부 형태와 종교기관을 허용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어떤 조치를 매우 가까운 장래에 취하자는 그루의 제안을 스팀슨이 가장 강력하게 동의한다··· 스팀슨과 그루 두 사람 모두 이러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만약 효과를 거두려면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루 국무장관 대리는 대통령이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에 대해 스팀슨 장관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다르다고 말했다. >히틀러가 자살하고 무솔리니가 살해된 이후, 일본 정계의 일차적 관심사는 일왕의 운명이었다. 일본인들에게 그는 신과 같은 존재였고, 그에게 위해를 가한다거나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히로히토가 최후까지 싸우길 원했던 광적인 사무라이 집단에 둘러싸여 그들에게 휘둘린 불운한 지도자였다는 것이 최근 미국에서 나오는 평가이긴 하지만, 그가 신적인 존재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군부 엘리트들조차도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살'을 거부한 가운데, 아키히토 일왕의 항복 이후로 일본 군부 강경파의 부재가 입증되었으므로 그가 신적인 존재였다는 견해를 과장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1945년에 도청을 통해서 미국의 고위 관리들은 일본 외교관들이 일왕의 지위가 존중되고 보장되길 원했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7월 13일에 미국의 관리들은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가 종전을 절박하게 원하던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에게 보낸 암호 전문을 해독했다. 그 전문은 "'무조건 항복'이 평화의 유일한 걸림돌"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 >6월 19일 회의에서 위의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도, 스팀슨은 마셜 장군에게 전쟁 목적을 규정하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의 포기를 제안했었다. 이에 반대하여 6월 9일에 작성된 메모에 마셜은 이렇게 썼다. "이 시점에서 일탈하면 우리의 바뀐 목적에 관한 바람직스럽지 못한 수준의 의문과 의혹이 발생할 것입니다." 대신에 마셜은 "우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관한 논의를 중단하고, 패배와 무장해제의 견지에서 우리의 진정한 목표 규정에 착수"하자고 제안했다. 스팀슨은 회고록에서 그 자신이 "일왕에 대한 특별 보장이 포츠담 최후통첩에 포함되길 희망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밝힌다. 사실 스팀슨은 일본 왕실의 존속을 보장하는 표현이 포함된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포츠담에서 그러한 생각을 가진 이는 스팀슨뿐만이 아니었다. 무조건 항복 요구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을 지지했던 또 다른 사람은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 처칠은 무조건 항복 요구가 걸림돌이 될 것이라며 반대하면서,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군사적 체면을 유지하고 국가 존립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방안을 모색하자고 촉구했다. 트루먼은 처칠의 주장을 '퉁명스럽게' 일축했다.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면서 도덕적인 경계를 이미 넘어섰고, 이제는 도덕적인 진정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트루먼의 주장이었다. 트루먼은 일본군에게는 "진주만 공격 이후로는 그 어떤 군사적 명예도 없다"고 말했다. > >처칠의 실용적인 견해는 반영되지 않았고, 스팀슨의 견해도 마찬가지였다. 스팀슨이 작성한 포츠담 선언문 초안은 심하게 수정되었다. 트루먼은 '현재의 왕조'유지를 규정한 스팀슨의 문구를 직접 삭제했는데, 이것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대한 행위들 중 하나였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어구는 선언문의 마지막 구절에 당당하게 등장했으며 이는 왕실의 완전한 굴복을 전망하는 것에 대한 적나라한 강조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에게는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 일왕과 관련된 표현을 떠올리면서 트루먼은 신임 국무장관 제임스 F. 번스의 영향을 받았다. 다시 작성된 최후통첩에는 '현재의 왕조'를 존중한다는 표현을 대체하여 번스가 작성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포함되었다. "일본국민을 기만하고 오도했던 자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 > >... 6월 30일에 번스는 국무장관에 임명되었고, 7월경에 그는 원자폭탄을 일본과 연관지은 것만큼 소련과 연관지어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가 무조건 항복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자폭탄이 현실이 되자 번스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포츠담 회담은 7월 15일에 개최되었다. 그 다음날 암호명 '트리니티' 작전으로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 폭발 실험이 있었다. 스팀슨은 번스에게 원자폭탄 사용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달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게 호소했다. 그러나 번스는 대통령을 들먹이며 스팀슨의 요청을 무시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은 신임 국무장관 번스에게는 일본을 용서해 주는 일보다 더 중요했다. 일본은 어제의 골칫거리였던 반면 소련은 내일의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그 점이 포츠담 회담의 성격을 규정했다. >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모든 평화협상안을 거부했으며 일왕 문제에 대해서 유연함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일본을 완전히 절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포츠담 선언 이틀 전에 트루먼이 이미 일본 도시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명령을 승인했다는 사실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 >그 해에 스팀슨은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자신이 ≪하퍼≫지에서 지적하지 못했던 사항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역사는 미국이 (일왕에 대한) 입장 발표를 연기함으로써 전쟁을 지연시켰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 >그러나 미국인들은 스팀슨의 고백보다 훨씬 놀라운 어떤 사실을 무시했는데, 그것은 심지어 '''원자폭탄 2개조차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다음날인 8월 10일 오전 7시 33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최고 통치기구인 어전회의(御前会議)로부터 모스 부호로 구성된 암호 메시지를 접수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 정부는 포츠담에서 발표된 공동 선언문의 취지가 최고통치자로서의 천황 폐하의 특권들을 손상시키는 그 어떤 요구와도 타협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그 선언문에 열거되어 있는 조건들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다." > >트루먼은 오전 9시에 전시내각을 소집하여,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일본 측의 메시지가 분명한 조건을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포츠담 선언의 수락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물어보았다. 당연히 국무장관 번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일본 측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측의 제안을 수락하면 미국이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번스는 "포츠담 선언의 완전성과 엄정함에서 후퇴했다는 비판이 미국에 쏟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그 자신이 지지했던 완전성과 엄정함이었다. 그러한 비판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만약 미국이 일본 왕실의 존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일본이 그것을 원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알려지기 몇 주 전에, 심지어 몇 달 전에 미국 정부가 그러한 조건을 제안하지 않았던 이유와 관련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번스는 이 점에 대해서도 민감했다. 왜냐하면 번스가 스팀슨이 작성한 포츠담 선언문 초안을 수정하자고 트루먼에게 촉구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번스는 줄곧 일왕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해진 고통의 규모를 그날 아침에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트루먼의 조언자들은 그 시점에서 무조건 항복 요구를 철회하면 원자폭탄 사용의 '불가피한' 정당성이 상당히 훼손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트루먼, 번스, 스팀슨 등등의 인물들이 곧바로 원자폭탄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 >결국 일본의 항복 제안에 대하여 미국은 항복 조건이 유효한 배경을 확대하면서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 문제를 교묘하게 처리했다. 미국은 포츠담에서 트루먼과 번스가 삭제했던 표현과 사실상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다. 미국의 회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항복 조건들을 이행하는 데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들을 취할 것이며, 일왕의 권한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귀속될 것이다···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 정부의 최종 형태는 일본 국민의 자유의사로 확정될 것이다." 히로히토 자신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극단적인 군국주의자들조차도 여기에 복종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생각보다는 완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전쟁이 끝났다. > >묘한 점은 많은 -어쩌면 대부분의- 일본군 병사들의 전투를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 일왕의 권위를 통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무렵 일본군 병사들은 순수하고 단순하게 일왕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연합군 측은 히로히토를 그 자리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연합군 측은 미주리호 선상에서 거행된 항복 조인식에 참석하는 치욕을 면해 줌으로써 그의 역할을 존중했다. 이처럼 계산된 아량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더라면, 분명 일본과의 전쟁이 훨씬 빨리 끝났을 것이다. 그 때문에 ''''왜 미국이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라는 뻔한 질문이 제기된다.''' >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러한 질문들과 씨름했지만, 수정주의자들의 거두인 가르 엘페로비츠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 문제를 다룬 사람은 없었다. 그의 1965년 저서인 ≪핵의 외교: 히로시마와 포츠담 Atomic Diplomacy: Hiroshima and Potsdam≫은 원자폭탄이 일본보다는 소련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그 후에 발간된 ≪원자폭탄 사용 결정 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은 기밀이 해제된 문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 책에서 엘페로비츠는 트루먼이 원자폭탄과 관련된 첫 회의에 참석한 4월 25일에 이미, 그로브스 장군의 표현을 빌리자면 ‘러시아 정세’에 끼칠 원자폭탄의 영향이 중요한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일본을 침공함으로써 관심을 딴 데로 돌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치 독일의 위협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위협도 1945년 여름 무렵에 실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번스와 트루먼이 항복의 조건을 분명히 하길 거부하면서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을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포츠담 선언이 무조건성의 표현으로 회귀함으로써 구체화된 그러한 무관심은 원자폭탄 사용의 가장 큰 목적이 일본과의 전쟁 종식이 아니라 소련과의 예상되는 갈등 양상을 통제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로 제압하려고 했던 대상이 히로히토 일왕이 아니라 소련의 수상 스탈린이었다면 어떨까? 원자폭탄 투하가 추축국 일본을 향한 마지막 일격이 아니라 크렘린을 겨냥한 첫 번째 일격이었다면, 다시 말해 동유럽을 향한 소련의 명확한 영토 구상을 실행하지 말라는 경고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전쟁과 정치에서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요인으로 구성된 해답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원자폭탄은 마지막 일격인 동시에 첫 번째 일격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역사학자 바턴 번스타인은 원자폭탄 투하 목적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대한 압력 행사였다고 주장한다. 2005년에 일본의 역사학자 하세가와 쓰요시는 일본의 자체 문헌들에 의존하여 ≪암투: 스탈린, 트루먼과 일본의 항복 Racing the Enemy: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하세가와는 트루먼이 원자폭탄을 사용한 목적은 (임박했던) 일본의 항복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라, 소련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강요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복잡한 역사 분석을 익힌다고 해서 트루먼이 기만적이라거나 불필요한 원자폭탄 공격 명령을 내릴 만큼 냉혹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신속한 항복을 이끌어 내려던 의도와 소련에 대한 위협 의도의 혼동을 목격하는 것은, 트루먼 자신이 발견한 상황의 끔찍한 복잡성을 인정하는 셈일 뿐이다. 기만적인 것은 원자폭탄 투하 이후에 트루먼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제기한 도덕 및 군사적 명쾌함과 단순함에 대한 주장이다. >...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원자폭탄이 소련에 대한 위협을 실행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그러한 결론 -스팀슨의 불만 섞인 표현을 빌리자면 “다소 과시하는 듯이 맥을 못 추게 만든”- 에 이미 도달했든 아니든, 일본을 상대로 그러한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트루먼과 그의 측근들은 원자폭탄이 전후 세계에서 미국에 커다란 영향력을 부여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와 같은 무제한적인 영향력은 떨쳐 버리기 힘든 환상이었고, (...) 전후 미국의 탁월함을 공고화하는 목표가 원자폭탄 투하 이후에 결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할지라도, 미국의 지배에 대한 전망이 일본의 항복 의사를 수용하려는 모든 욕구를 눌러 버린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원폭 투하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원자폭탄의 비할 바 없는 치명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수십만 명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도가 어떠했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정확하게 일본뿐만 아니라-일본이 주요 대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세계를 향한 이중 목적의 과시였다.''' >---- >제임스 캐럴, 전쟁의 집, 88~101p >껄끄러운 사실들의 예로 원자폭탄에 대한 미국 정부 자체의 전후 평가가 있다. 이 평가에서 미국 정부는 전략폭격연구소의 보고서에 기술된 것처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 1945년 12월 31일 이전에, 그리고 1945년 11월 1일 이전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러시아가 참전하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일본 본토 침공이 계획되거나 기도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다.”''' > >Summary Report(Pacifir War), Unites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July 1, 1946 >---- >제임스 캐럴, 전쟁의 집 108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